여수 아트디오션 갤러리
한글문자의 속내
자음과 모음의 의미 반포하다
예술을 한 눈에 감동을 준다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숨겨져 있다. 다만 감정이라는 특수한 내면의 기후와 일치한다면 눈물을 흘리던가 좀더 작품의 스토리를 암기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화의 스토리는 원화를 감상하지 않아도 작품을 구매하지 않아도 상식과 지적 도구로 저장된 사람들이 많다. 지적 도구란 어디선가 사용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지적도구는 상류의 격을 갖춘듯 싶지만, 예술가의 작품마다 스토리를 꾸미는 허상의 드라마가 늘 존재하지 않는다. 과일껍질 벗기듯 그림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가 될수 있다.
화가의 물감은 감정이다. 감정이 색채가 된다는 것은 색들마다 살아 있는 꿈틀거림이 있다. 화가의 감정은 때론 소리로 전해진다.
대중에게 색채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익숙한 것만 채집하는 편향이 없다면 미술은 그나마 대중적이지 못했다. 예술이 언어가 되어지는 것도 대중의 성급함이 도움 되었다. 아터제는 ‘그림은 내가 너에게 가는 배’라고 했다.
추상회화를 접한 사람들은 추상에서 아무것도 볼것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빈곤과 성급함을 드러내는 고백이 뿌리내지지 않고 메말라 버릴줄 상상했겠나. 도리어 추상이 침묵의 언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종종 그림에는 어떤 칭찬되는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평가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추상에 기호나 부호같은 작가의 키워드를 설정해 두었다.
낙서 같지만 은유적 유희가 있고 무수한 직선과 곡선을 쏟아내는 소리가 아닌 정제된 언어이다. 모든 작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 조차도 관객이 알고 있는 이미지가 아닐수 있다. 그것이 회화이고 추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익숙하다. 그냥 익숙할뿐이다. 자음과 모음 각 각의 의미는 모르거나 관심없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것이나 수능에 출제되지 않은 것에 관심과 체온을 나누기를 바란다는 것은 모욕이거나 학문에 대한 배신이다.
한글 자음이나 모음은 익숙해 졌기에 관객들 입장에서 빈곤과 무지가 도출되는 시점이다. 기호적 자음과 모음의 형태는 알수 있지만 드러내고자 또는 밝히고자 하는 문자의 속내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한국사람으로서 자음도 모르고 모음도 몰라도 한글을 읽을줄 알면 더이상 알필요 없는 것이 한글로 뿌리내렸다.
한글 자모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한글을 사용해도 되지만, 이젠 알았으면 싶다. 그속에 한국인으로 살아야 할 진정성과 긍지 또는 귀함을 알수 있다. 한글이 현대회화가 되려면 간결과 색의 조화 그리고 해학적 신명이 필요하다. 현대회화는 누구든지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쉬워 보이는 대중적 눈높이에 다가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일반인으로 할수 있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 그 작품에는 별도의 싸인이나 흔적이 없어도 브랜드가 될것이다. 현대회화는 상업적 브랜드로 정착할때 그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보성 작가는 자음다움, 모음다움을 통해 우리의 놀이 문화와 전통을 통해 현대회화의 키워드를 발견했다고 한다.
오롯이 한글 작업 39년이 준 선물이다고 고백한다.
금보성.홍익대박사수료.백석대교수. 개인전78회.금보성아트센터관장.현대시 등단.